오늘 여행은 중국의 문화 역사 유적지 코스(화청지, 지하궁전, 병마용, 진시황릉)가 주를 이룬다. 중국인들이 꼽는 3명의 지도자가 진시황, 칭기스칸, 모택동인데 진시황의 도시가 바로 서안이다. 서안은 역사적으로 주나라 이후 5,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우리나라 경주와 자매결연 도시이다.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13개 나라의 수도였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수도 426년으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당나라 이후로는 지방도시로 몰락한다.  참고로 낙양은 9개 나라의 도읍지였다. 현재 중국을 지배하는 "한족"의 개념도 한나라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장강과 황하 유역사이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한족"으로 부르면서 정립된 개념이다.

   서안(장안)은 서울 면적의 16배 크기이며,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도시로서 중국내 8위다. 인구는 1,400만명이 살고 있다. 현재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 부친의 고향이다. 현재 삼성 반도체 공장이 지어지고 있다. 원래 공기는 5년인데 이는 중국의 건축실상을 모르는 삼성측의 실수(한국이라면 당연히 5년내에 완공되지만)로 5년이 연기되어 10년간 공사가 진행중이다. 또한 교육의 도시로서 200여개의 대학교가 있으며 90만명의 재학생과 매년 38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여기서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 전역으로 직장을 구해 떠나는 추세이며, 호텔 관광 관련 학과의 학생들이 이곳에 남아 이곳 지역사회의 주류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서안에서 유명한 것은 당현종과 양옥환(귀비), 진시황이다. 특산품으로 석류와 복숭아, 아기 주먹만한 대추와 포도 등이 있으며 특히 석류는 당나라 때 개척한 실크로드(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를 통해 이란 들여온 과일이다.

   양옥환(귀비)의 고향은 충칭(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현재 중국에서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는 하얼빈과 충칭, 그리고 성도란다. 양귀비는 1남 4녀중 4째 딸로 태어났는데 10살때 그 아버지가 죽었다. 몰락한 가문의 딸출신으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장안의 삼촌집으로 입양된다. 삼촌은 당나라 황실의 악단장으로서 음악적 조예가 매우 깊었다. 중국 문화에서 응접실과 서재는 가장의 권위를 보여주는데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응접실에서 먼저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상대방에 대해서 파악이 되고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면 내부 응접실(서재)로 손님을 모신다. 그래서 서재는 집주인과 조강지처만 평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제한구역이다. 10살의 양옥환이 삼촌집에 갔으나 사촌형제들과 잘 어울릴 수가 없었고 왕따를 당하던차 삼촌의 서재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각종 서적, 특히 음악서적에 빠져들게 된다. 기댈 곳 없는 옥환이 음악세계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몰래몰래 다니다가 어느날 일찍 퇴근한 삼촌에게 들키게 되는데, 어린 것이 음악공부하는게 신기하기도 해서 몇가지 물어보던 삼촌은 옥환의 총명함에 놀라고 감동받아서 본격적으로 제자로서 가르치게 된다.

   3년이 지나서 13세때 궁의 악사로 취업(꽌시, 삼촌의 빽그라운드~!)해서 삼촌의 최측근에서 돕다가 16세때 삼촌이 은퇴하면서 악단장에 취임하게 된다. 요즘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리더십과 음악실력이 아주 뛰어났다는 것이다.

   당현종은 아들 20명과 딸 10명을 낳았는데 그 중 하미공주가 결혼식을 하는데 그날 공연을 양옥환에게 부탁한다. 그때 누나를 따라서 놀러온 18번째 아들 수왕이 양옥환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래서 삼촌을 찾아가서 결혼을 부탁하게 되고 삼촌의 적극적인 권유에 못이겨 옥환은 첫번째 16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단, 결혼의 조건으로서 궁의 악단장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양옥환이 22세때 당현종을 만나게 된다. 현종은 업무에 미친사람으로서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을 위해서 매진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측실 무혜비였는데 개원30년, 당현종 56세때 무혜비가 죽는다. 외로운 마음에 악단의 공연을 보다가 너무도 획기적이고 감동적인 공연에 악단장을 찾게 되고 그때에 당현종이 옥환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당연히 명절때마다 왕자들이 왕비를 데리고 인사를 했었지만 서열 18위의 왕자를 눈여겨 봤을까? 그러니 며느리를 몰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현종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서 옥환과 대화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고 감탄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눈여겨 본 내시 고력사가 수왕에게 찾아가서 결혼생활 6년동안 아기가 없음을 이유로 양옥환을 친정(삼촌댁)에 돌려보내게끔 작업을 한다.

   양옥환에게 반한 당현종은 대명궁으로 바로 데려온다. 사료에 따르면 지금 자금성의 3배 규모였단다. 바로 부인으로 삼을 수가 없어서 무혜비의 명복을 빌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도교 도사로 출교를 시키고 장생전을 지어 무혜비의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후 5년 동안 두 사람은 장생전에서 사랑을 나누며 음악을 작곡하고 춤을 추며 실재로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추앙 받는 백거이의 처녀작이 "장한가"다. 백거이는 당현종 사후 50년의 사람이다. 장한가에 의하면 양옥환은 3,000명의 후궁들이 받아야할 사랑을 1명이 받았다고 평가했다. 이쯤 되면 양옥환의 외모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되는데 키 160Cm에 65Kg의 몸무게였단다. 당시 당나라는 강력한 국력에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서민들조차 부유하여 영양상태가 아~주 좋았단다. 당시 사람들의 키가 140~150 사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아주 출중한 체격조건이다. 외모는 직접 안봐서 당연히 모르겠으나 양옥환의 초상화는 중국엔 없고 대만 박물관에 있단다. 양옥환의 나이 27세 때 양귀비로 책봉하고 조강지처인 황후를 폐위시킴으로서 실질적인 황후자리에 앉히게 된다.

  평생을 일만하다가 양옥환을 만난 당현종, 당연히 업무에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다. 755년 안록산이 현재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공격을 당하게 되서 도망을 다니게 된다. 756년에 마외역(복숭아 과수원)에서 친위대장의 압박에 못이겨 양귀비에게 죽음을 내리게 되고, 양귀비는 스스로 복숭아 나무에 목을 메어 3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종 72세때 촉나라 성도까지 도망을 갔었고,  757년에 그의 아들 진왕이 장안성을 탈환하였다. 역사상 당현종과 양귀비는 이야기는 여기서 마감이 되었으나 초짜 시인 백거이에 의해서 뒷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 이 뒷부분 때문에 신인 백거이는 초특급 베스트 셀러 작가로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장안(서안)으로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현종,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일을 지내던 어느날 도사가 찾아온다. 그토록 사랑하던 양귀비(혼)를 불러주겠단다. 너무도 기쁜 당현종. 그런데 아무리 술법을 써도 소환되지 않는 양귀비, 점을 쳐보니 죽은뒤 저승길로 간 것이 아니라 승천하여 선녀가 되었다. 귀신이라면 소환되는데 선녀라서 소환이 안된다고 한다. 방법이 없냐고 현종이 묻자 도사는 스스로 유체이탈하여 봉래도(중국인들에겐 천당과 같은 곳)에 가서 스스로 찾아오게 끔 설득해야 한단다. 간곡히 부탁하는 현종, 도사는 유체이탈하여 영혼으로 봉래도의 봉래궁으로 찾아가 양옥환을 만났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이 다 지워지고 하나도 기억을 못하는 것이었다. 거의 포기하던 찰나 "이윤기"라는 이름을 대자 기적적으로 기억이 살아난 양옥환, 이에 약속을 잡는데 귀신도 아닌 선녀라서 함부로 지상세계로 내려올 수 가 없었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하여  7월 7일 칠석날로 약속을 잡고 술법을 부려 까지로 다리를 내어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야기 속의 당현종이 지은 시(사실은 백거이가 지은 것)가 당시 여인네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에서 다시 소개한다.

 

09:30   호텔 출발

          

11:00~12:10   화청지 관람

  버스 전용주차장에서 내려서 약 5분을 걸어가면 화청지(궁) 입구가 나온다. 입구 맞은편 당현종과 양귀비의 분수대에서 인증샷!

 

 

 

 분수대 맞은 편에 화청궁 액자가 보인다.

 

 

 

 엄청 비싼 입장료다! 1인당 22,000원이다.

 

 

 

   화청지에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건물, 딱봐도 궁전처럼 복원되어 있다. 장생전이다. 둘이 사랑을 나누며 음악을 작곡했던 곳이다.

 

 

 

장생전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 컷!

 

 

 

   양귀비의 목욕탕으로 가는 길에 수중 무대가 보였다. 밤이 되면 이 곳 전체가 거대한 세트장이 되어서 움직이고 레이져와 물안개등의 특수효과와 더불어 배우들의 공연이 시작된다고 한다. 북경의 금면왕조처럼 이곳의 총감독도 장예모 감독이란다. 작품명은 "장한가"

 

 

 

 백거이를 일약 대문호로 만들어준 그의 작품 "장한가"이다. 시멘트를 죽전 모양으로  작품처럼 구성해 놓았다.

 

   한황중색사경국  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어우다년구불득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양재심규인미식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천생려질난자기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륙궁분대무안색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온천수골세응지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도다

   시시신승은택시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운빈화안김보요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부용장난도춘소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서 일어나니

   종차군왕불조조  이를 좇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승환시연무한가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춘종춘유야전야  봄을 좇는 춘정을 즐겨 온밤을 지새우니

   후궁가려삼천인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삼천총애재일신  삼천의 총애가 그녀에 있으니

   김옥장성교시야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옥누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자매제형개렬사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가련광채생문호  예쁘게 여기 가문에 광채가 나니

   수령천하부모심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불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려궁고처입청운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속에 들어 있고

   선낙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완가만무응사죽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진일군왕간불족  군왕은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도다.

   어양고고동지내  돌연 어양 쪽 땅을 울리는 악관의 북소리 들려오니

   경파예상우의곡  예상우의곡에 깜짝 놀라도다.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西   천승만기서남항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가고

   취화요요항부지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   서출도문백여리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역에는 

   륙군불발무나하  육군을 보내지 못해 어찌 할 수 없어

   완전아미마전사  미인의 긴 눈썹이 구부러지며 굴러 군마 앞에 죽었네

   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 군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취교김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 땅에 흩어졌네

   군왕엄면구불득  군왕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회간혈누상화류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굽은 잔도 검각산을 오르네

   아미산하소인항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정기무광일색박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촉강수벽촉산청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성주조조모모정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항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야우문령장단성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요

   천선지전회룡어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도차주저불능거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마외파하니토중  말 높은 고래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불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군신상고진첨의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귀내지원개의구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 없어

   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부용도 미양궁의 버들도

   부용여면류여미  부용은 양귀비 얼굴 버들은 눈썹

   대차여하불누수  이들을 대하고 어찌 아니 눈물 드리우리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며 살구꽃이 만발하고

   추우오동섭낙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   서궁남내다추초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滿   낙섭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으니

   리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초방아감청아노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殿   석전형비사초연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

   고등도진미성면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지지종고초장야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다는 것을 알았네

   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원앙와냉상화중  원앙같이 금슬좋은 기와는 차고 서리꽃이 심해지나

   비취금한수여공  함께 덮을 이 없는 싸늘한 비취금침

   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혼백불증내입몽  꿈속에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네

   림공도사홍도객  임공의 도인이 도성에서 머무는데

   능이정성치혼백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위감군왕전전사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수교방사은근멱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상궁벽낙하황천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량처망망개불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선산 있어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누각령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기중작약다선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중유일인자옥진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설부화모삼차시  눈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 그인 것 같다"하네

西   김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使   문도한가천자사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구화장리몽혼경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람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주박은병이리개  길게 이어진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니

   운계반편신수각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화관불정하당내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오네.

   풍취선몌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

   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리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 하구나

   함정응제사군왕  정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일별음용량묘망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殿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

   유장구물표심정  장차오래 지닐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전합김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씩 상자는 한 쪽씩

   채벽황김합분전  황금 비녀 토막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단교심사김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천상인간회상견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림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사중유서량심지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재지원위련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綿綿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비익조는 중국의 전설상의 새로서 눈도 하나 날개도 하나 발도 하나인 암수 한쌍의 새다. 하늘을 날려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동시에 날갯짓을 해야하므로 떨어져선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랑하는 연인을 뜻한다. 연리지는 상식이니 설명 생략. 학창시절 유덕화가 주연했던 "천장지구" 영화가 생각난다. "천장지구"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이 문구의 출처가 바로 "장한가"였던 것이다.

 

 

 

 

 장한가 바로 앞에 있는 감나무이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접붙한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감이 맺혀있고 오직 이곳 화청지에만 있는 귀중한 나무라고 한다.

 

 

 

 뒤에 보이는 나무가 석류나무다. 석류나무 자체가 큰 나무가 아니라고 한다. 이곳에선 이 나무의 나이를 400년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곳이 양귀비가 목욕한 해당탕이다.

 

 

 

 해당화를 닮아서 해당탕이다. 이곳에서 먼저 양귀비가 목욕을 한 뒤 당현종 전용 탕으로 이동했다 한다.

 

 

 

 이곳이 당현종 전용탕인 연화탕이다. 이곳에서 당현종이 목욕을 하고 있으면 양귀비가 넘어왔다고 한다.

 

 

 

 행운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 넣었다.

 

 

 

 이곳 성신탕은 "정관의 치"로 권력을 잡은 당황제 이세민의 전용탕이었단다.

 

 

 

 원래는 노천탕이었단다.

 

 

 

 

이곳은 향신탕이다. 일종의 대중탕으로서 주로 시녀나 하인들이 사용했다.

 

 

 

 향신탕의 내부 모습이다.

 

 

  왜 온천인데 물이 없을까? 원래 이곳은 사료속에만 존재했었다. 온천관광지를 개발하던 와중에 유적지가 발견되어서 오늘날의 관광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온천물은 흘렀지만 지금 이곳엔 약수터 정도의 규모만 재현하고 나머지 물줄기는 화청지 바로 옆 온천호텔에서 다 끌어다 쓴다고 한다.

 

 

   양귀비 상이다. 대리석이나 석고가 아니라 백옥상이라고 한다. 양귀비의 자태와 어울리지 않게 문명인답게 행동하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지난 5월 이전엔 이 빨간 금줄이 없었다. 5월 노동절때 관광객들로 붐볐는데, 그때 남자들이 양귀비의 오른쪽 가슴을 잡고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오른쪽 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5월부터 금줄이 설치됐단다. 어딜가나 남자들이 문제다. 어쨌거나 인증샷!

 

 

 

 매표에서 적혀있는 티켓의 가격이 심상치 않다. 이것은 바로 "장한가" 공연 티켓 안내이다.

 

 

 

 이 드넓은 공간이 변신, 건물들의 위아래 높낮이가 생기면서 입체감 있는 극장이 된다하니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싶은 "장한가"공연이다.

 

 

  화청지를 돌아보고 느낌 소감 :  "경국지색"으로 알려진 양옥환(귀비)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사랑의 대상이 당현종이었다는 것이 비운의 주인공으로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점심식사하러 이동 중에 버스의 차창으로 관람한 곳이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의 조형물이 분수대와 함게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화청지 근처에 있는 광장이다. 서안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중에 한 곳으로 아침엔 운동하러, 저녁엔 데이트하러 많이 오는 곳이란다.

 

 

 

12:30~11:50   중식

 마찬가지 중국 현지식이다. 고등어 구이가 생각외로 맛있었다. 유채기름에 볶은 야채 요리들도 먹을 만 했다.

 

 

 

 

 13:55~14:10   지하궁전 관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대역사를 일으킨다. 도로망 정비, 화폐통일, 만리장성 축조, 진시황릉 건설 등 총 200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당시 중국 전체 인구가 2,000만명이었으니 국민 1/10을 공사에 동원한 샘이다. 200만명 중에 진시황릉 건설에 동원된 인력은 72만명이다. 진시황 등극 직후(39세)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진시황 사후(50세 사망) 1년까지 공사를 진행했다.

입장료는 성수기 40위엔(8,000원)이다.

 

 

 

   이 지하궁전은 실재 진시황릉 지하에 있는 무덤을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진시황릉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도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지하궁전 지하입구에서 본 진시황릉의 지하 묘실(관)이다.

 

 

 

   1층으로 올라가면 동서남북 4면으로 진시황의 각종 행사가 재현되어 있다. 진시황 등기(극), 6국 궁전(천하 재후들의 조공), 6국 강호(각국 미녀들), 천하순시 등 4가지 장면이다.

 

 

 

 지하궁전 1층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진시황의 묘실이 보인다.

 

 

 

 중국을 통일한 뒤 현장순시를 나가는 진시황이다. 복을 비는 중국인들이 돈을 던져 놓았다.

 

 

 

 진시황릉 개발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중국 전토 가운데 묘실이 있으며 황하와 양쯔강이 실재와 똑같이 구현해놓았는데, 그 주재료가 바로 "수은"이다. 엄청난 양의 수은(100T이상으로 추정)이 매장되어 있어서 중독될 수 있기에 사실상 중국 정부도 포기한 샘이다.

 

 

 

 지하궁전 2층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저 좁은 관람로를 가득 채운 중국사람들, 여기도 방학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어딜가나 사람들로 넘쳤다.

 

 

 

 

 

 

 14:30~17:30   병마용 및 진시황릉 관람

                    진흙사람을 무덤에 같이 묻는 관습은 고대 사회시절 순장이 인권신장으로 말미암아 개선된 형태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길 진시황제 이후 그런 관습은 없겠거니 하지만 한나라 경제 때에도 무덤에 흙사람을 같이 묻었다. 병마용의 병사들의 키는 180~190Cm인데 당시 인간으로서 가장 큰 키라고 한다. 우리 국군의 의장대와 같은 병사들이다.

   이곳은 1974년 밀밭에 우물을 파려던 양씨촌 사람 양씨 등 3명이 작업 중에 인형의 머리통을 발견함으로서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정작 중국의 정식사료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있는 지도 몰랐을 뿐더러 사서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곳이 발굴되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병마용은 세계8대 불가사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호갱이 처음으로 발굴을 시작한 곳으로 6,000명의 인형이 들어있다. 현재 1,000명이 복원되어 서서 정렬되어 있으며 나머지 5,000명은 여전히 복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인형들의 손을 보면 다 무구를 쥐고 있는 모양인데 정작 무구는 없다.  2호갱은 마차와 기마병, 활기병, 석공병이 동쪽을 바라보고 배치되어 있다.  3호갱은 68명이 유일한데,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작전회의실, 지휘통제실로 추정된다. 1,2,3호갱 모두 진나라 당시 전쟁수행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동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진시황 사후 그를 지키는 군대를 동쪽에 배치한 것이다.

 여기도 가족단위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왠지 고급져 보이는 입장권이다. 가격은 220위엔이다. (44,000원) 정말 비싸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입장~!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복원된 인형이 3개인데 그 중에 하나인 석궁수이다. 얼굴과 갑옷의 칼라까지 채색되어 있다. 원래 발굴된 모든 인형들이 색칠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기중에 노출된 순간 산화되어 색깔이 다 날라갔다. 다행이 이 석궁수는 채색이 다 날라가기직전에 진공처리되서 색을 살릴 수 있고 실재로 전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꿇어앉은 오른쪽 발의 뒷면에는 당시 신발의 밑창까지 재현되어 있어서 놀라움을 감출 수 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진나라의 계급은 신발의 앞굽이 높이로 구분이 된다. 앞창이 낮을 수록 신분이 낮은 것을 의미한다.

 

 

 

 이곳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1관이다.

 

 

 

   1관의 오른쪽에 위치한 2관이다. 3관은 2관의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들의 위치가 뒤죽박죽인 까딹은 병마용 발견 뒤에 건물을 올렸기 때문이다.

 

 

 

 여긴 병마용과 진시황릉 발굴 및 개발관련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시간이 없다면 안봐도 그만인 수준이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가면 이렇게 발굴당시의 역사기록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인형들이 발굴된 장소와 인형들의 다양한 표정과 수염, 머리형태와 복식

 

 

 

 최초 발견된 1관의 위용!

 

 

 

 박물관에서 가장 공을 들인 전차를 발굴하는 모습이다.

 

 

 

 맑은 장신구까지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다. 말은 오늘날 기준으로 몽고말이다. 체구는 작으나 지구력은 좋은 전마이다.

 

 

 

 79년 당시 건물을 세워 완공한뒤 관람객들이 입장하는 모습

 

 

 

 실재로 발굴 작업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발굴이 되면 제대로 형체를 갖춘 것 보단 다 부셔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번호표를 부여하여 하나씩 복원해 나간다.

 

 

 

 야간 작업하는 모습이다. 각 실마다 흑벽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흑벽위에 나무로 천장을 구성하여 보존되고 있었다.

 

 

 

 전차를 완벽하게 복원한 모습이다.

 

 

 

 박물관 내에 유리관으로 전시된 인형의 모습이다. 줄자와 각종 작업도구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보니 이렇게 전차가 있었다.

 

 

 

 실재로 보면 엄청나게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전차가 최초로 발견되었을 당시의 기록 사진이다. 보다시피 전차는 산산조각나 있다.

 

 

 

  이건 함께 복원된 거푸집이다. 실재로 병마용의 병사들의 손은 전부다 무구를 쥐고 있는 형태이다. 기록과 전승에 따르면 초패왕 항우가 이곳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무구는 다 회수해서 썼다고 한다.

 

 

 

 함께 발굴된 각종 토기와 장식들

 

 

 

 당시 청동기 무기들이다.

 

 

 

 이건 창과 극이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고 나서 2관으로 향했다.

 

 

 

 2관의 규모 또한 굉장히 컸다.

 

 

 

 이렇게 번호표를 붙이고 자신의 나머지 부분과 결합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인형들이 바로 보인다.

 

 

 

 아직 작업 개시 조차 못한 인형들이 산만하게 누워있다.

 

 

 가장 완벽한 형태로 발굴된 석궁수인형이다. 바로 여기에서 발굴되었단다.

 

 

 

 이건 입궁수, 서서 활을 쏘는 병사다. 역시 계급이 아주 낮다.

 

 

 

 이건 마병이다.

 

 

 

 이건 장군이다. 가장 유명한 인형 3인방 중 하나. 원래 두손아래 청동검이 있었다. 신발의 앞굽이를 보면 앞으로 휘어서 올라가 있다. 계급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건 중급 군사다. 문관 또는 행정일을 했던 사무관으로 보인다.

 

 

 

 이건 최초 발견되었을때 인형의 갑옷이 채색되어 있던 상태의 기록 사진!

 

 

 

 가장 유명한 석궁수 인형이다.

 

 

 

 뒷 모습을 보면 신발의 밑창과 채색된 갑옷까지 다 관찰 할 수 있다.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2관에서 3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유료사진(입체사진) 찍는 곳이다. 사진만 찍어도 돈을 내야함은 물론 직접 인화해주는 가격은 한국돈 2만원이다. 2관 관람을 마치고 3관으로 향했다. 3관은 2관의 뒷편에 있다.

 

 

 

 3관 입구이다.

 

 

 

 3관은 2관보다 그 규모가 작다.

 

 

 

 대신 제병과가 다 구성되어 있고

 

 

 

 이렇게 작전회의실도 구성되어 있다.

 

 

 

 인형의 목부분에 구멍이 뚤려 있는 이유는 다리 따로 몸통따로 목따로 제작해서 결합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이다. 3관 관람을 마치고 대망의 1관으로 향했다. 1관은 3관 뒷문으로 나오자 마자 퇴장로로 역방향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1관!

 

 

 

 수 없이 많은 군사와 전마들

 

 

 

 자세히 보면 전방의 3열은 갑옷이 없다. 바로 포로로 잡은 적국의 병사들이며 이들을 전투시에 화살받이로 썼다. 잔인하여 적에게 공포심을 주면서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군의 사기를 꺽어버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본 전투대형을 역사적 사실 그대로 여과없이 볼 수 있다.

 

 

 

   1관의 현관부분에서 찍은 인증샷! 내 인생 살면서 꼭 와보고 싶었던 세계8대 불가사리의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데...살찐 저 똥배와 나잇살이 부끄럽다. T T...

 

 

 

 1관 전체의 모습이다. 그 규모의 웅장함과 더불어, 예술적 가치까지 더해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전면 3열의 포로들과 마찬가지 측면도 1열로 포로들을 배치해서 적의 기습공격으로 부터 대비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파!!!

 병마용 1관 출입구의 모습이다. 역시 사전에 계획한데로 역순으로 관람해 보길 정말 잘했다.

 

 

 

병마용 관람을 다 마친뒤 박물관을 배경으로 단체샷~!

 

 

 가이드의 인솔하에 이젠 진시황릉으로 걸어서 15분 정도 이동한다. 가는 길 곳곳에 상점과 음식점들이 있다.

 

 

 

 드디어 도착한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의 구성도면이다. 그 웅장한 규모를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이 바로 진시황릉이다. 원래 사료에 따르면 높이가 120M였으나 초패왕에 의해 도굴을 당하고 나무 천장을 제거하여 주저않아 버린 이유 등으로 현재는 75M로 낮아졌다.

 

 

 

19:00~20:40   석식

  땀과 먼지에 쪄든 몸을 씻은 뒤 우리가 묵는 해승호텔 자체 식당에서 중국 현지식을 먹었다. 이곳도 한국인 관광객을 고려하여 김치가 나왔다. 식사 후 맥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3일차 여행기 끝~!

Posted by 강철캡틴